기획특집
[국민*인 책다방 #12] 부끄러움의 윤리학 | |||
---|---|---|---|
‘인간의 행위에 대한 도덕적인 가치판단과 규범을 연구하는 학문.’ 바로 윤리학의 정의다. 그리고 여기, 이러한 윤리학의 관점에서 볼 책 「무진 기행」과 「염소는 힘이 세다」에 두 주인공이 있다. 어떻게 보면 두 주인공은 정반대되는 인물일 것이다. 먼저 「무진 기행」의 윤희중은 부와 명예를 가진 남부러울 것 없는 사람이다. 하지만 그 부와 명예는 온전히 자신의 것이 아닌 아내와 아내의 아버지가 만들어낸 작품이다. 그래서 자신의 고향인 무진에 애착을 갖지 않는다고 하지만 예전의 자신을 닮은 무진에 끌리고 만다. 반면에「염소는 힘이 세다」의 ‘나’는 어리다. 부와 명예보다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살기만 하면 된다. 우연히 할머니를 도와 하게 된 염소탕 장사는 썩 마음에 들지 않는다. 고약한 냄새로 코가 역하기 때문이다. 또 자신의 집에 들락날락하며 누나에게 치근덕거리는 합승 정거장 남자가 마음에 들지 않아 올 때마다 째려보곤 한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무진 기행」의 윤희중과 「염소는 힘이 세다」의 ‘나’는 변한다. ‘윤희중’은 아내에게서 온 전보와 오랫동안 다툰 끝에 서울로 꼭 데려오겠다는, 하인숙에게 보내는 편지를 찢는다. 결국엔 아내를 선택하고 무진을 떠나는 버스에 오른다. 어린 ‘나’는 역겨워했던 염소탕 냄새가 더는 좋지도, 싫지도 않다고 말한다. 또 항상 째려보던 합승정거장 남자와 누나가 여관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보고도 그냥 돌아오며 외면하는 행동을 보인다. 여기서 아무런 관련도 없던 두 사람 사이에, 삶의 생존본능에 굴복했다는 공통점이 생긴다. 그와 함께 무기력한 자신의 모습에 대한 부끄러움도 볼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그들을 비판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1960년대부터 시작된 급격한 산업화 과정에서 나타난 속물주의와 출세주의로 인해 현실에 적응하지 못하던 당시 상황도 무시할 수는 없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두 주인공의 가치판단에 어떠한 평가를 할 수 있을까? 심층적인 평을 위해 문학에 한 일가견 있는 국문학도들을 국민*인 책다방에 초대했다.
Q : ‘염소는 힘이 세다’ 책제목에서 염소가 힘이 세다는 것이 역설적이에요. 어린 주인공이 왜 그렇게 썼다고 생각하나요? 윤: 질문에 전반적으로 동감하지만, 조금 다르게 생각해보면 염소가 약한 존재가 아닐 수 있다고 생각해요. 저자 김승옥이 4.19 세대 작가라는 점을 감안하고 생각해볼 때, 작품 속에서 염소는 유일하게 특정 논리나 타인의 힘에 종속되지 않고 자유의지로 행동할 수 있는 캐릭터예요. 염소 이외에는 다들 힘의 논리나 타인의 의견에 따라 행동하고요. 나아가 염소는 감당할 수 없는 지옥의 무게를 지닌 생사탕 단지를 깨뜨리기까지 해요. 이런 점에서 저는 염소를 자아, 자유의지의 표상으로 생각해볼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이외에도, 염소탕이 정력의 상징으로, 힘의 논리에 경도되어 힘을 갈망하는 인물군 상을 끌어들인다는 점으로도 ‘염소는 힘이 세다’는 표현을 이해해볼 수 있을 것 같아요. 박: 저는 조금 다른데, 글 속에서 가장 힘이 없는 존재를 ‘힘이 세다.’ 라고 나타낸 것은 어쩌면 힘없는 어린 화자의 바람이지 않았을까요? ‘염소는 힘이 세다.’ 는 역설적인 어린 화자의 문장이 실제로는 연약한 염소의 모습과는 대조되면서 비극성을 자아내요. 작가는 인간이 소외되고 물질이 지배하기 시작한, 도시적 삶의 생존논리에 따라 굴러가는 사회의 단면을 아이의 시선으로 담아 비극성을 더욱 강조하고 있기도 하고요. 또한 ‘염소는 힘이 세다.’ 라는 문장은 글의 흐름을 끊으며 뜬금없이 등장해서는 낯설게 하기 효과를 수행하게 해요. 흐름을 끊음으로써 독자에게 생각의 여지를 제공해 독자가 능동적으로 작품을 수용하도록 돕고 있는 거죠. Q : ‘무진 기행’에서의 하인숙은 윤희중에게 어떤 의미라고 생각하나요? 윤: 하인숙은 윤희중에게 자신을 서울로 데려가 달라고 하잖아요. 자신의 모습을 지닌 하인숙을 서울로 데려가는 것은 윤희중에게 있어 자아의 회복, 자아동일성 확보의 시도라고 봐요. 박 : 저도 같은 생각이에요. ‘박’과 ‘조’ 사이에서 방황하는 하인숙은 서울과 무진의 경계에 있으면서도 어디 한군데에 정착하지 못하는 ‘나’의 모습을 보여줘요. 또 그녀가 중간적 인물임은 그녀가 부르는 아리아와 유행가 사이의 거리에서도 잘 드러나는 부분이에요. 윤: 하지만 하인숙은 결국 서울로 가지 않기로 하고는 ‘어떤 갠 날’을 불러주겠다 하며 윤희중이 무진에 있는 일주일 동안만 멋있는 연애를 하겠다고 말해요.
Q : 그렇다면 윤찬영 씨는 하인숙이 윤희중과 완전히 같은 모습을 지녔다고는 생각하시지 않는 거네요? 윤: 맞아요. 하인숙은 세속적 가치를 포기하고 순수의 영역에 남기를 택한 것이라 할 수 있어요. 하지만 윤희중은 무진을 떠나 서울로 돌아가야 하는 존재이며, 그런 점에서 순수의 영역보다는 세속적 가치에 더 가까운 인물이에요. 그렇기에 윤희중에게 현실을 포기한 순수한 사랑은 있을 수 없어요. 결국, 아내의 전보를 받은 윤희중은 서울의 일상으로 돌아가게 되듯이요. Q : 두 책 모두 마지막엔 생존본능에 굴복하는 면을 보이잖아요, 그렇다면 두 책의 주인공들을 현실에 타협하게 된 부정적인 인물로 말할 수 있지 않을까요? 윤: 먼저 두 작품은 자아가 세계의 질서에 통합되는 과정으로 나아가는 통과제의*의 면모를 가지고 있어요. 봉건시대에는 자아가 시련이라는 훈련을 거치고, 세계의 질서에 동화되어 안정된 질서 회복되는 방향으로 나아갔었고요. 그러나 근대로 넘어오며 세계로부터 분리된 자아가 나타나며 세계와 동질적이지 않은 자아에게 시련은 훈련이 아닌 혼란으로 바뀌어요. 그렇기에 그 제의의 결말이 통합이 아닌 자아의 분열이나 일탈과 같은 방향으로 변형되기도 하고요. 하지만 두 작품에는 대체로 ‘분리-전이-통합’의 형식이 크게 바뀌지 않은 채 적용돼요. 윤희중은 무진에서의 자아 찾기에 실패한 채 자아 동질성을 확보하지 못하고 일상으로 돌아가고, 「염소는 힘이 세다」의 ‘나’는 힘의 논리에 익숙해지는 것처럼요. 그렇다고 해서 이들을 부정적 인물이라 단정 짓기는 어려워요. 우리도 살면서 몇 번이고 크든 작든 이들과 비슷한 선택을 하잖아요. 이들이 내린 선택은 대적하고 있는 상대가 세계라는 거대 개념이었기 때문에 내린 선택이라고 생각해요. *통과제의 : 문제를 지닌 인물이 공동체로부터 분리돼 시련을 겪은 뒤 이를 극복하고 성장해 다시 공동체에 통합되는 ‘분리-전이-통합’의 과정이 주요 골자다. 박: 저도 찬영이말에 공감해요. 도시적 삶의 논리에 적응한 사람을 과연 부정적인 인물이라고 평가내릴 수 있을까요? 이미 자아와 세계의 대결에서 자아가 압도적으로 승리할 수 있는 시대는 지났어요. 사회의 압력이 개인 자아의 힘보다 센 현대사회에서 도시적 삶의 논리에 적응하는 것은 살아가기 위한 일종의 ‘처세술’이라고 생각해요. 특히 이 작품은 그 처세술 사이에서 발생하는 ‘부끄러움’이라는 인간의 본질적인 감정에 관해 묻고 있고요. 또, 작가는 다른 작품에서 ‘수치심이 있어야 명예롭게 살 수 있다. 자아의 책임에 대해 깨달을 수 있기 때문이다.’ 라고 이야기했었어요. 이처럼 세계와 대결을 할 수는 없지만 ‘부끄러움’이라는 감정을 느끼게 된다는 것 자체가 작은 자아의 힘으로 할 수 있는 최선의 저항 방법이라고 생각해요.
Q : 그렇게 보면, ‘무진 기행’과 ‘염소는 힘이 세다.’ 두 작품 모두 현대사회와 맞닿아 있는 것 같아요. 박, 윤: 동감해요. 자아의 힘보다 사회의 압력이 더 강한 현대사회에서 현대인들은 곧잘 사회의 기준에 따라 의견을 결정하잖아요. ‘이 나이에는 무엇을 해야 한다’, ‘성공을 하려면 무엇을 해야 한다’와 같은 사회적 기준들이 개인의 선택을 압도하는 것처럼요. 또, 끊임없이 새로운 욕망 창출되는 현대사회에서 우리는 힘의 유혹 앞에서 항상 갈등해요. 이들이 보여주는 모습은 결국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비극과도 같다고 할 수 있겠네요. Q : 책에서 무진은 고향, 안식처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자신에게도 그런 곳이 있나요? 박: 그런 생각을 한 적은 있어요. ‘서울에 사는 사람들은 서울을 고향이라고 생각할까?’ , ‘서울(도시)에서 편안함과 고요함을 느낄 수 있을까.’ 저에게는 19년을 살아온 고향(시골)이 있어요. 저의 가족이 있는 공간이고 유년을 간직한 공간이에요. 각박한 홀로서기 서울살이에 지칠 때면 저는 고향을 찾는 편이기도 하고요. 하지만 무진 기행이란 작품이 저의 인생을 이루는 뼈대 중에 하나가 된 이유는 작가의 갈등에 공감할 수 있었기 때문인데요. 저에게도 시골은 꿈(무의식)과 같은 공간이에요. 안식은 좋지만 반대로 안식에 잠식해 발전이 없는 공간이죠. 안식은 잠깐이면 충분해요 ‘무진’도 그래요. 단순히 원초적 모성 이미지의 시골이 아니라 불안이 지배하는 공간이자 다시 또 현실에서 치열하게 뛰어야 해요. 윤: 저는 서울에서 태어나서 서울에서 자란, 전형적인 현대 도시인이에요. 줄곧 고향에서 살아온 셈이지만, 그렇다고 서울이 내 고향, 안식처라는 인식은 별로 들지는 않아요. 그런 점에서는 윤희중에게 무진이 가지는 의미와 내게 서울이 가지는 의미는 비슷하다 할 수 있을 것 같네요. 또, 윤희중에게도 무진은 온전히 안식처로서의 공간이 되지는 않고요. 어두운 청년의 기억과 외로움을 상기시키는 공간인 무진을 평소에는 잊고 지내다시피 하니까요. 이는 자신과 존재의 관련을 망각해 자신의 고향을 상실하는, 고향 상실과도 맞닿아 있어요.
Q : 반대로 자신이 무진 기행의 윤희중이었다면, 어떤 선택을 했을 것 같나요? 박: 저라면 윤희중처럼 아내의 전보를 받은 후 서울로 돌아오는 선택을 할 것 같아요. 세계와 자아의 대립에서 자아가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는 일은 이미 옛이야기라고 생각해요. 현대사회에서는 개인이 가진 자아의 힘보다 사회의 압력이 훨씬 세요. 서울에 돌아오지 않고 하인숙을 택하는 일이 과연 옳다고 할 수 있을까요?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고 생각돼요. 또한, 저는 자아와 세계에서 고민하는 윤희중 자체를 높게 평가합니다! 윤: 저는 애초에 무진으로 가지 않았을 거예요. 사실상 무진으로 향하는 데는 현실도피의 목적이 크며, 무진에서 자아를 찾고 자아 동질성을 확보하려는 시도는 필연적으로 실패할 수밖에 없으니까요. 이는 무진이 갖는 공간 특성과 큰 연관이 있는데요. 무진을 살펴보려면 우선 안개에 주목할 필요가 있어요. 무진은 안개로 둘러싸인 도시예요. 안개는 구름 같이 흩어지는 존재기에 허무주의와도 연관되고요. 또, 무진은 바다와 맞닿은 도시예요. 이 작품에서 푸른색은 죽음의 색으로 사용되기에 무진은 죽음과 마주한 도시인 거죠. 정리하자면, 죽음을 가까이 둔 채, 현실과 단절된 비현실 공간인 무진으로의 도피로는 아무것도 해결할 수 없고, 본질적으로 무진은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공간이 아니라고 생각해요.
Q : 마지막으로 국어국문학과로서 두 책에 대한 평가 부탁드릴게요! 윤: 개인적으로 김승옥은 가장 좋아하는 작가 다섯 손가락 안에 꼽을 수 있는 작가예요. 특히 무진 기행은 김승옥 작품 중에서도 가장 좋아하는 작품이기도 하고요! 서사적으로 크게 무리하지 않으면서, 구조를 정교하게 단단히 쌓아간 좋은 작품이라고 생각해요. 또 소품 활용이나 묘사도 충실하게 해나가며 디테일 면에서도 정교하게 구축해나간 완성도도 높은 작품이고요. 하지만 그런 만큼 구조가 훤히 들여다보여 의도한 바가 직선적으로 노출되기도 하는 아쉬움이 있어요. 박: 저도 아직 1학년이라 국어국문학과로서 말씀을 드리기는 부끄럽지만, 개인적으로 김승옥 작가를 매우 좋아해요. 김승옥 작가를 두고 단편 미학의 전범이라는 말이 왜 나왔는지, 그의 작품을 한번 읽으면 바로 이해하게 돼요. 김승옥은 소설이라는 갈래에 서정을 듬뿍 담아내는 작가예요. 그의 묘사에는 시각적 상상을 뛰어넘는 무언가가 있는데, 그 무언가를 ‘무진 기행’에 한정시켜 말하자면 촉각적 상상이라고 말하고 싶네요. 또한, 김승옥 작가만이 구사할 수 있는 독특한 문체는 무진 기행에서 더욱이 빛을 발해요. ‘무진에 명산물이 없는 게 아니다. 나는 그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 그것은 안개다.’ 라는 문장을 보는 순간부터 여러분은 안갯속을 헤매게 될 거예요. (웃음) 그러니 무진 기행과 함께 기형도의 안개라는 시도 읽어보길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