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 덮인 산 속, 두 갈래 길이 있다. 한 쪽 길엔 사람의 발자국의 흔적이 남아있다.
그러나 반대 쪽엔 산동물 한 마리 지나간 흔적
하나 없이 새하얀 도화지처럼 조용히 눈이 덮혀있다. 새하얀 도화지에 자신의 발자국을 새기며 그림을 그리는 것처럼 세상엔 남들이 걷지 않은 길을
가는 이들이 있다.
지난해, 몇몇 학교에서 여자 ROTC를 시범적으로 창설한 이래로 올해 국민대에도 ROTC 단복을 입은 여성들이
눈에 뜨인다. 스쳐지나가는 낯선 풍경에 사람들의 시선은 자연스레 그녀들을 따라간다. 그녀들을 바라보며 사람들은 많은 궁금증을 품었으리라
생각된다.
국민대 캠퍼스 속, 충성을 외치는 그녀들 이국형(경영정보 10), 박미진(식품영양 10)을 만났다.
지금부터 여자
ROTC에 대해 품었던 궁금증들을 하나씩 풀어나간다.
왼쪽
이국형(경영정보 10), 오른쪽 박미진(식품영양 10)
Q. 여자 ROTC를
만나러 간다고 주변 사람들에게 궁금한 게 있으면 대신 물어봐 줄 테니 뭐든 말해보라고 하니 대부분이 ‘왜 ROTC를 하는가?’를 묻더라. 그래서
제일 첫 번째로 묻는다. 왜 ROTC에 지원하게 되었나?
박미진(이하 박) : (웃음) 그럴 것 같았다.
친구들한테도 많이 듣는 질문이다. 특별한 계기가 있었다고 하기 보다는 어렸을 때부터 딱히 여성적이진 않았다. 내가 ROTC를 택한 것은 취향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고등학교 때부터 진로를 사관학교 등으로 생각했지만 운이 닿질 않았다. 그래서 꼭 사관학교가 아니더라도 어떻게 하면 군인이 될
수 있을지를 다양하게 찾아봤다. 학교 와서도 전공에 정을 붙이지 못하고 있는 와중에 작년에 난 모집공고를 보고 두 번 고민 없이 지원했다. 또
어렸을때부터 운동을 워낙 좋아했다. 태권도를 꽤 오래 했다. 군인이 아니면 경찰 쪽에도 관심을 가지는 등 진로 탐색의 방향을 그쪽으로 두고
있었다. 솔직히 여자가 군대 가는 건 쉬운 결정은 아니라고 본다. 그 어려운 결정에 자기가 하고 싶은 마음이 없다면 어떻게 하겠는가. 말하자면,
하고 싶어서 하는 거다.
이국형(이하 이) : 별로 다르지 않지만, 타의에 의한 선택은 아니다. 내가 정말 하고 싶었다. 사실 어렸을 적부터 아버지께서 군인을
했으면 좋겠다고 넌지시 말씀하시곤 했다. 영향을 받지 않았다면 거짓말이겠지만 온전히 그것 때문은 아니다. 언젠가 뉴스에서 첫 여성 파일럿을 보며
짜릿했던 기억이 있다. 나도 그런 존재가 되었으면 했다. 대한민국에서 남자에게 군대는 당연한 것으로 여겨지지만 여자는 그렇지 않다. 남들이 가지
않는 길을 간다는 것에 매력을 느꼈던 것 같다. 군인에겐 무언가 정리된 느낌이 난다. 각도 잡혀 있고. 그런 모습들이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제복도 멋있고(웃음) 보통 여자들이 하지 않는 것을 하는 자긍심을 느낄 수 있단 생각이 들기도
했다.
Q. ROTC 지원 모집 공고를 보고 어떤 생각을
했나?
박 : 보는 순간 온몸이 찌릿해지더라. 지난해 인근에 있는 고려대에선 시범학교로 선정되어 여자
ROTC가 있었는데, 그게 참 부러웠었다. 그래서 모집공고를 보며 ‘아싸!’를 외쳤다.
이 : 막연한 꿈을 구체적으로 실현할 길은 찾은
것. 딱 그것이었다. 2014년엔 생긴다는 설이 많았다. 그래서 그것 때문에 휴학을 생각하기도 했으니까. 어쩌면 올해 내가 이렇게 단복을 입고
있는 것도 내가 되려고 그랬던 것 같다.(웃음)
Q. ROTC는
여태껏 남자들만의 영역이었다. 그래서 남자들 위주로 맞춰진 것들이 많을 것이다. 훈련의 기준이나 강도도 마찬가지일 것 같은데, 어떤가 힘들진
않나?
박 : 여자훈련체계가 따로 있진 않다. 모든 훈련은 동일하게 실시한다. 힘들다고 해도 내가 선택한
길이니까 모든 일에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 임하고 있다. 오히려 뒤쳐지는 모습을 보이기 싫어서 이를 악물고 뛴다.
이 : 지난
동계훈련에 참가했을 때도 생활관만 여자들과 썼지 모든 훈련은 동일하게 진행됐다. 헬멧 씌어놓고 보면 여자인지 남자인지 구분할 필요도
없거니와 구분 자체가 안 된다. 실제로 임명장 수여식에서도 여자부생이 제일 앞줄에 서있었는데 여자부생들 어디 갔냐며 찾기도
했다.
Q. 여자 ROTC를 위해 ROTC에서 개선되어야 할 점이 있다고
생각하나?
박 : 그런 건 딱히 없지만, 사람들이 우리를 여자 ROTC가 아닌 그냥 ROTC로 봐주었으면
좋겠다. 동기라고 생각지 않고 여자로 생각하면 우리도 불편하고 다른 분들도 불편해진다. 같은 후보생으로 봐주었으면 좋겠다. 군대에는 위계질서가
필요하다. 우리가 여자라 야단치는 것도 어려워하시는 분들도 계신다. 하지만 우리에겐 오히려 그런 것들이 불편할 수 있다.
이 : 그래서
우리도 훈련할 때 사람들이 ‘여자이기 때문에’ 가질 수 있는 편견을 못 가지도록 있는 힘을 다해 달린다. 우리는 배려하고 챙길 대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똑같이 ROTC의 일원이다.
Q. ROTC가 가져다주는 이점이 있다면
무엇인가?
박 : 아침에 일찍 일어나니까 하루가 이렇게 길다는 걸 새삼 깨닫게 되었다. 거기서부터 자부심이
생겨난다. 남들보다 하루를 빨리 시간하고 길게 쓴다는 것. 체계적이고 규칙적으로 하루를 보낸다는 게 꽤 보람차다. 지켜보는 사람이 많기 때문에
행동을 더 바르게 하려고 한다. 그러면서 나 스스로가 더 발라지는 거 같기도 하다.
이 : ROTC에 속해있단 ‘소속감’이란 게 크다.
사실 요즘 대학에선 소속감을 갖기란 어렵다. 또, 다른 사람 앞에서 리더로 설 수 있단 게 나에겐 어마어마한 이점이다. 또 그런 생각에 매사에
적극적으로 하려고 한다. 자부심으로 어깨가 많이 올라간다. 사람들의 시선이 많이 신경 쓰이기도 하지만 요즘은 즐기기도
한다(웃음)
Q. 아직 그 속에서 긴 시간을 보낸 건 아니겠지만,
재밌는 에피소드는 없나?
박 : 얼마 전에 홍보영상을 찍기 위해 춤연습을 했었다. 틈날 때마다, 또
주말도 반납하고 동기들과 연습했다. 땀 흘리며 무언가를 함께 하는데 큰 즐거움을 느꼈다. 힘들었지만 재밌었다.
이 : 같이 발을 맞추면서
앞으로 ROTC 안에서 생활도 동기들과 연습 때처럼 호흡을 잘 맞춰서 나간다면 더 다이내믹하고 재밌을 것 같단 기대가 생겼다.
Q. 남자 생도들은 학교마다 인원이 정해져있지만 여자는 지역단위로
뽑았다고 들었다. 그래서 결국 여자 ROTC가 아예 없는 학교도 있다고 하더라. 경쟁률이 만만치 않았을 텐데, 준비는 어떻게 했나? 비결 좀
알려 달라.
박 : 어렸을 때부터 태권도를 좋아해서 기초체력엔 문제가 없었다. 생활관에 들어오기 전엔
시흥에서 통학하기도 했다. 긴 통학시간으로 더 강인해졌다. (웃음) 집에 철봉 비슷한 걸 두고 팔굽혀펴기도하고, 학교 운동장에서 같이 지원한
남자 동기랑 학교 운동장 달리기도 했다. 침대에 발을 걸고 윗몸일으키기도 정해진 시간 안에 최대한 할 수 있는 양을 매일 했다.
이 :
나는 학교 응원단 용두리 응원단에서 기초체력을 길렀다. 마찬가지로 집에서 가족들 도움 받으며 준비했다. 꾸준히 하는 게 중요하다.
Q. 여자 ROTC 되기 희망하는 사람들에게 줄 수 있는 메시지가
있다면?
박 : ROTC는 또 다른 세상이다. 개인이 아닌 단체로 평가받는 것에 대한 책임감도 가지고 무엇보다
사람들 앞에 서서 리더가 될 수 있다. 망설이다간 놓칠 수도 있다. 30일까지 지원이니 많이들 지원했으면 좋겠다.
이 : ROTC는 메마른
생활에 충분한 자극제가 된다. 이미 마음속에 하고픈 마음이 싹트고 있다면, 안 하고 후회하는 것 보다 일단 도전하라. 인생은 한 번
뿐이니까.
이야기를 하는 내내 하고 싶은 일을 할 때에만 나올 수 있는 에너지, 자신들이 ROTC인 것에 대한 자부심과 애정이 듬뿍 느껴졌다.
힘든 ROTC 생활이지만 인터뷰 내내 그랬던 것처럼, 그녀들은 긍정의 힘으로 모든 걸 극복하고 있었다. 그녀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뜻이 있는 곳엔
역시 길이 있구나 하는 것을 느꼈다. 남들이 가지 않는 길을 선뜻 떠난 그녀들을 보며 우리는 어떤 길을 갈 것인가를 생각해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